스트레스 기억은 사라지는 대신 다시 쓰일 수 있다…15분 PASER가 보여준 기억의 유연성

어두운 스트레스 기억의 장면들이 점차 밝은 풍경으로 변화하며, 과거의 기억을 새로운 관점에서 바라보고 감정적 안정을 찾아가는 과정을 표현한 이미지
스트레스 기억은 사라지지 않더라도 다시 떠올리고 처리하는 과정에서 감정적 의미가 달라질 수 있다. PASER 연구는 기억 재고착 과정에 개입해 스트레스 기억과 관련된 감정적 불편감을 낮출 가능성을 제시한다.



한 번 지나간 일은 바꿀 수 없지만, 그 일을 기억하는 방식은 달라질 수 있다. 최근 연구는 스트레스 기억을 다시 불러내는 순간이 감정의 무게를 바꾸는 기회가 될 가능성을 보여준다.

어떤 기억은 사건이 끝난 뒤에 더 오래 남는다. 이미 지나간 말 한마디가 밤이 되면 다시 떠오르고, 몇 주 전의 실수가 오늘 일처럼 가슴을 조이기도 한다. 머리로는 ‘끝난 일’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몸은 좀처럼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우리는 흔히 시간이 해결해 줄 것이라고 말한다. 실제로 시간에는 그런 힘이 있다. 같은 기억을 반복해서 떠올리다 보면 처음만큼 아프지 않게 되는 경우도 많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습관화 또는 둔감화라고 설명한다.

그런데 시간이 아니라 기억을 ‘다시 저장하는 방식’을 바꿀 수 있다면 어떨까. 2026년 8월 Frontiers in Cognition에 발표된 연구는 이 질문을 PASER(Procesamiento Asistido en Situaciones Estresantes Recientes)라는 약 10~15분의 짧은 심리 개입을 통해 살펴봤다. 연구진은 단순히 스트레스 기억을 반복해서 떠올렸을 때보다 PASER를 적용했을 때 감정적 불편감이 더 크게 감소한다는 결과를 얻었다.

연구가 흥미로운 이유는 단순히 ‘기분이 좋아졌다’는 사실에만 있지 않다. 우리가 과거라고 부르는 기억이 실제로는 꺼낼 때마다 일정 부분 다시 구성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건보다 그 사건이 남긴 기억과 더 오래 살아간다

스트레스는 반드시 거대한 사고나 재난의 모습으로 찾아오지 않는다. 직장에서 들었던 모욕적인 말, 중요한 시험에서의 실수, 인간관계의 갈등, 예상하지 못했던 실패도 오래 마음에 남을 수 있다. 임상적으로 ‘트라우마’라는 진단을 받을 정도는 아니더라도 그 장면을 떠올릴 때마다 불안하거나 화가 나고, 집중력이 떨어질 수 있다.

그래서 스트레스 사건 직후 어떤 심리적 개입을 하는 것이 좋은지는 오래된 연구 주제였다. 과거에는 사건을 자세히 떠올리고 이야기하도록 하는 디브리핑 같은 접근도 널리 연구됐다. 그러나 효과는 일관되지 않았다. 기억을 강하게 다시 경험하게 만드는 것이 항상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며, 상황에 따라서는 오히려 불편한 감정 반응을 강화할 가능성도 제기됐다.

여기서 중요한 질문이 생긴다. 괴로운 기억은 많이 떠올릴수록 약해지는 것일까, 아니면 다르게 떠올릴 때 비로소 달라지는 것일까. PASER 연구는 바로 이 차이를 구분하려 했다.

기억을 세 번 떠올렸을 때와 PASER를 받은 뒤의 변화는 달랐다

첫 번째 연구에는 부에노스아이레스대의 대학생 67명이 참여했다. 참가자의 나이는 20~55세였으며, 최근 3주 안에 경험한 비병리적 스트레스 상황 하나를 선택했다.

연구진은 APEEM이라는 7문항 척도로 그 기억을 떠올렸을 때 나타나는 감정적·신체적 불편감을 측정했다. 점수를 매길 때 참가자는 약 30초 동안 눈을 감고 당시의 이미지와 소리, 냄새, 느낌 등을 떠올렸다. 따라서 검사를 반복하는 것 자체가 일종의 짧은 기억 노출이었다. 연구진은 이를 이용해 ‘그냥 여러 번 떠올려서 익숙해지는 효과’와 PASER 이후의 변화를 비교했다. 

결과는 숫자로 보면 더 분명하다. 첫 측정의 평균 감정적 불편감은 38.88점이었다. 두 번째에는 36.37점, 세 번째에는 31.36점으로 내려갔다. 같은 기억을 반복해서 떠올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실제로 불편감이 조금씩 감소한 것이다.

그다음 연구진은 약 15분 동안 PASER를 실시했다. 네 번째 측정에서 평균 점수는 17.96점까지 내려갔다. PASER 직전인 세 번째 측정과 직후의 효과크기 Cohen's d는 0.98로 컸다. 논문 5쪽의 그래프에서도 첫 세 차례의 완만한 감소와 PASER 이후 나타난 큰 폭의 하락을 확인할 수 있다.

시간도 스트레스 기억의 감정을 어느 정도 누그러뜨렸다. 그러나 PASER 이후 나타난 감소 폭은 단순 반복 회상에서 관찰된 변화보다 훨씬 컸다.

PASER는 기억을 지우는 대신 ‘바라보는 위치’를 바꾼다

사람은 괴로운 일을 떠올릴 때 종종 기억 속으로 다시 들어간다. 그때의 내 눈으로 장면을 보고, 그때 들었던 목소리를 듣고, 당시 느꼈던 감정을 다시 경험한다. 달력으로는 과거인데 몸에게는 현재처럼 느껴지는 순간이다.

PASER가 주목되는 이유는 이 기억과 정면으로 싸우거나 단순히 억누르려 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약 15분 동안 진행되는 과정에는 긴장을 낮추고 몸의 감각에 집중하는 단계가 들어간다. 이후 스트레스 사건을 다시 경험하는 대신 마치 영화관 스크린에서 장면을 바라보듯 일정한 심리적 거리를 두고 떠올리게 한다.

참가자는 사건의 시작과 전개, 끝을 시간 순서대로 살펴본다. 안전한 장소를 상상하는 과정도 거치며, 기억 속 영상을 빠르게 재생하거나 흐릿하게 표현하기도 한다. 마지막에는 혼자가 아니라는 감각,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생각, 자신이 변화시킬 수 있는 부분과 그렇지 못한 부분을 구별하는 태도 같은 새로운 의미를 연결한다.

사건 자체는 변하지 않는다. 달라지는 것은 그 사건을 바라보는 현재의 위치다. 이런 접근은 스트레스 기억을 지워버리는 방법이라기보다 기억에 붙어 있는 감정과 의미를 다시 조직하려는 시도로 이해할 수 있다.

무작위 대조 실험에서도 단순한 시간 효과만으로는 설명되지 않았다

첫 번째 연구만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PASER를 받지 않고 조금 더 기다렸어도 감정적 불편감이 계속 줄었을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연구진은 두 번째 연구에서 이를 보완해 참가자를 무작위로 PASER군과 대조군에 배정했다.

총 48명이 분석에 포함됐으며 PASER군은 26명, 대조군은 22명이었다. 대조군에는 PASER 대신 같은 정도의 시간이 지나도록 시각적 주의분산 과제를 적용했다.

처음 두 집단의 감정적 불편감은 비슷했다. PASER군의 APEEM 평균은 37.12점, 대조군은 35.96점이었다. 실험 후 PASER군은 17.62점까지 감소했다. 약 52.5% 줄어든 수치다. 반면 대조군은 28.05점으로 내려가 약 22.0% 감소했다.

즉 시간이 지나고 다른 일에 주의를 돌리는 것만으로도 감정적 불편감은 어느 정도 줄었다. 하지만 PASER군에서는 감소 폭이 훨씬 컸다. 시간과 개입 조건의 상호작용은 F(1,46)=15.89, p<0.001, 부분 η²=0.257로 통계적으로 유의했다. 쉽게 말하면 단순히 시간이 흘렀기 때문에 모두가 편안해졌다는 설명만으로는 PASER군의 변화를 충분히 설명하기 어려웠다는 뜻이다.

기억은 창고에서 꺼내는 물건이 아니라 다시 저장되는 정보일 수 있다

그렇다면 왜 이런 결과가 나타났을까. 연구진이 제시한 핵심 가설은 기억 재고착(memory reconsolidation)이다.

우리는 기억을 흔히 창고에 넣어둔 물건처럼 생각한다. 경험이 뇌에 저장되고 필요할 때 그대로 꺼내 보는 방식이다. 그러나 기억 연구에서는 이미 저장된 기억도 다시 떠올리는 순간 일시적으로 불안정한 상태가 될 수 있다고 본다. 그 뒤 기억이 다시 안정적으로 저장되는 과정에서 새로운 정보가 기존 기억과 결합할 가능성이 있다. 이것이 기억 재고착의 핵심 개념이다.

오래전의 실수를 예로 들어보자. 당시 기억에는 ‘나는 실패했다’라는 강한 감정이 붙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지금 그 사건을 떠올리면서 ‘그 일은 이미 끝났다’, ‘나는 그 이후에도 앞으로 나아갔다’, ‘당시에는 보이지 않던 다른 선택지가 있었다’는 정보를 함께 처리한다면 사건의 사실은 그대로여도 그 기억이 가진 감정적 의미는 달라질 수 있다.

PASER가 실제로 작동한다면 바로 이런 과정이 한 가지 설명이 될 수 있다. 따라서 스트레스 기억을 줄이는 방법의 핵심은 기억을 억지로 잊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기억을 어떤 상태에서 불러내고, 어떤 새로운 정보와 의미를 함께 연결하느냐에 있을 가능성이 있다.

이번 연구가 ‘기억을 다시 썼다’고 증명한 것은 아니다

여기에서 연구 결과와 매력적인 해석 사이의 경계를 분명하게 할 필요가 있다. 이번 실험에서 직접 확인된 것은 PASER 이후 참가자가 보고한 감정적 불편감이 크게 감소했다는 사실이다.

연구진은 뇌 영상을 이용해 기억과 관련된 신경회로가 실제로 변화했는지 측정하지 않았다. 기억 재고착과 관련된 생물학적 지표를 조사한 것도 아니다. 따라서 ‘PASER가 기억 재고착을 일으켰다’는 설명은 현재로서는 가능한 메커니즘에 대한 가설이지 직접 증명된 사실은 아니다.

장기 효과도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 개입 직후 감소한 불편감이 일주일이나 몇 달 후에도 유지되는지, 시간이 많이 지난 뒤 같은 사건을 떠올렸을 때도 감정 반응이 낮게 유지되는지는 이번 연구만으로 알 수 없다.

표본 역시 크지 않다. 두 번째 연구의 분석 대상은 48명이었으며 참가자의 83.3%가 여성이었다. 일부 참가자에서는 개입 후 오히려 불편감이 증가하는 개별적 양상도 관찰됐다. 더 큰 표본과 균형 잡힌 참가자 구성, 장기 추적 연구가 필요한 이유다.

무엇보다 이번 연구의 참가자들은 PTSD 환자가 아니라 최근의 비병리적 스트레스 경험을 대상으로 했다. 따라서 이번 결과만으로 PASER를 PTSD 치료법이라고 부르거나 심각한 트라우마를 15분 만에 치료할 수 있다고 해석해서는 안 된다.

과거를 바꿀 수 없어도 과거가 현재에 닿는 방식은 달라질 수 있다

살면서 우리는 수많은 ‘이미 일어난 일’을 갖게 된다. 하지 말았어야 했던 말도 있고, 다시 돌아간다면 다르게 행동하고 싶은 날도 있다. 아무리 후회해도 사건 자체를 수정할 방법은 없다.

그래서 과거에 대한 가장 현실적인 태도는 망각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기억 연구가 보여주는 인간의 뇌는 조금 다른 가능성을 품고 있다. 기억은 보존되는 동시에 다시 구성된다. 과거의 사실을 바꾸지 않으면서도 그것이 현재의 나에게 주는 의미는 달라질 수 있다.

이번 PASER 연구도 그 가능성을 보여주는 하나의 단서다. 15분이라는 시간보다 중요한 것은 ‘52.5% 감소’라는 숫자만도 아니다. 더 근본적인 질문은 사람이 스트레스 기억을 다시 만나는 순간 무엇이 일어나는가에 있다.

괴로운 기억을 무조건 피하는 것과 그 기억 속으로 반복해서 뛰어드는 것 사이에는 또 하나의 길이 있을 수 있다. 충분히 안전한 상태에서 거리를 두고 바라보고, 사건의 시작과 끝을 확인하고, 현재의 자신이 가진 정보와 의미를 기억에 연결하는 길이다.

물론 PASER가 실제 임상 현장에서 얼마나 널리 적용될 수 있는지는 더 엄격한 연구가 답해야 한다. 그럼에도 이번 연구가 남기는 생각은 분명하다. 사건은 과거에 고정돼 있어도 그 사건을 기억하는 사람은 계속 변한다. 어쩌면 회복은 과거를 지우는 일이 아니라 과거가 오늘의 나를 붙잡는 힘을 조금씩 바꾸어 가는 과정인지도 모른다.

이 글의 의의

스트레스 기억을 줄이는 방법은 단순히 잊거나 반복해서 떠올리는 것만이 아니라, 기억을 다시 불러낼 때 새로운 의미를 연결하는 과정과 관련될 수 있다.
PASER 연구는 약 15분의 심리 개입 후 감정적 불편감이 대조군보다 크게 감소해 기억 재고착과 감정 조절의 가능성을 보여줬다.
특히 스트레스 기억이 왜 오래 지속되는지, 기억 재고착이 어떻게 감정 반응을 바꿀 수 있는지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연구 단서를 제공한다.
다만 PASER가 PTSD 치료법으로 입증된 것은 아니며, 장기 효과와 실제 기억 재고착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더 큰 규모의 후속 연구가 필요하다.
결국 이 연구의 핵심은 과거의 사건 자체는 바꿀 수 없어도 그 사건을 기억하는 방식과 감정적 의미는 달라질 가능성이 있다는 점에 있다.

출처

Petrone, J. E., Romero, L. D., Oliva Montaudo, A., Evans, L. A., & Piñeyro, D. R. (2026). Disrupting emotional memory: PASER as a potential reconsolidation-based intervention in stressful experiences. Frontiers in Cognition, 5, 1868072. DOI: 10.3389/fcogn.2026.1868072. :contentReference[oaicite:2]{index=2}